QT / 큐티는 매일 만나를 먹는 일이다.

 

일전에 보스톤에 사시는 한 목사님과  

큐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자신은 묵상을 하면 늘 설교를 준비하는 식으로  

원어도 찾고 주석도 하면서 성경을 읽게 된다고 한다.  

이제 그런 패턴이 몸에 익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의견과 다르다고 말했다.  

큐티는 매일 만나를 먹는 일이다.  

설교를 준비하는 시간이 아니다.  

그저 매일 먹고 일상에서  

그 한 가지 말씀을 기억하며  

끊임없이 그 말씀 앞에 나를 내려놓는 일이다.  

말 그대로 ‘일용할’ 양식이다. 

 

축적될 무엇인가를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묵상실력이 늘어나기를 연습하는 것도 아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먼저 서기를 소원하는 것,  

그 말씀을 마음에 품고 하루를 사는 것,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일용공의  

‘헐렁한’ 돈 주머니 같은 것, 그것뿐이다.  

그래서 큐티는 수로보니게 여인이 구했던  

빵 부스러기 한 조각을 찾는 일과 흡사하다.  

 

‘묵상 실용론’에 내가 반대하는 이유다.  

처음부터 지나치게 많은 질문을 던지고  

연구자료들을 동원하여 마치 매일 아침마다  

소논문이라도 작성해야 할 듯한  

부담을 갖고 시작하려는 것도 그래서 반대다.  

 

어쩌다 다른 목적으로 그렇게 시도해볼 수 있다. 

그러나 매일 먹는 만나를 처음부터 그렇게 무시무시한  

인공 장비들을 동원하여 얻어내려고 덤빈다면  

입에 넣기도 전에 상해버리고 만다. 

다음에 써먹을 목적으로 저장해둘라치는 순간 

일용할 만나는 더 이상 신선한 만나가 될 수 없었다. 

 

큐티에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령님의 인도를 구하며  

나 혼자서 그 음성에 깊이 귀기울이며  

그분의 인도에 나를 내맡기는 순종이 요구된다.  

그러한 자세가 바로 큐티 이후의 삶의 자세를 결정한다. 

 

이것이 성령님께서 큐티를 하는 사람에게  

종종 말씀을 대하는 동안 

‘절망감’ 같은 걸 느끼게 하는 이유다.  

마치 절벽 앞에 선 느낌이다. 

처음엔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고,  

그 어떤 향내도 맡을 수 없다. 

어떤 말씀을 구해야 할지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이것은 자신을 의지하지 말라는  

성령님의 ‘일단 정지’ 싸인이다.  

자신의 상상력과 지식으로 내달려온 습성을 

여전히 재료 삼으려는 그 처세술은 

여기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는 경고다.  

하늘에서 내리는 신령한 만나는  

땅에서 지어내려고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쳐다보며 가만히 기다려야 한다는 싸인이다. 

만나는 소낙비나 우박처럼 급하게 내리지 않고 

이슬처럼 천천히 내려와 앉았다고 성경은 말한다. 

 

“저녁에는 메추라기가 와서 진에 덮이고  

아침에는 이슬이 진 사면에 있더니 

그 이슬이 마른 후에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세미한 것이 있는지라”(출 16:13-14). 

 

내가 무엇인가를 먹을 때 

그 음식이 어떤 것이든  

그 원초적인 재료는 내가 지어낸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사’하신 것이다. 

그래서 땅에 살면서 하늘의 만나를 구할 때도  

‘하나님이 안 주시면 나는 못 먹습니다’  

하는 간절함이 날마다 새로이 필요하다.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탁하지 못하는 죄인들에게는 

사실 자기 요령으로 큐티를 적당히   

‘해치우는’ 일이 더 쉬울 수 있다. 

전기 밥솥으로 밥을 짓듯 큐티를  

‘지어내는’ 일이 더 간편할지 모른다.  

 

그러나 큐티는 어떤 ‘작업’이기 이전에 

단순히 ‘기다리는’ 일이다.  

나는 멈추고 성령님이 내 안에서 진행하시길  

인내하며 기다리는 일이다. 

 

먼저 기다리는 인내의 과정 없이 

‘작업’부터 꾸리려는 그릇된 관성을 버려야 한다. 

내 삶의 식탁에 구체적으로 가져와 깊은 맛을 우려내게 하고 

내가 먹기 좋게 버무려 내 안에서 잘 소화시키기 위해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요리’를 시작하는 순간은 

바로 그 한 움큼의 일용할 말씀이 ‘주어진’ 뒤부터다. 

 

“만나는 깟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 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밤에 이슬이 진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더라”(민 11:7-9). 

 

큐티가 어려운 이유는 바로 이 기다리는 과정 때문이다. 

아니, 이것 때문에 큐티가 어려운 것이어야 한다. 

큐티가 ‘조용한 시간’이어야 하는 이유는 

묵묵한 기다림을 대전제로 삼는 까닭이다.   

 

그러나 ‘조용한 시간’을 시공간 속에  

펼쳐드리는 일은 내가 하지만, 

그 시간의 질을 결정하시고 

그 안에 내용을 채우시는 분은 성령님이시다. 

 

큐티는 날마다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는 예배이며,  

급하게 또는 한꺼번에 해치울 수 없는 꾸준한 훈련인 만큼  

내 삶의 나머지 부분이 바로 그 자세에서부터 

끊임없이 흘러 나와야 할 그 어떤 것이다. 

 

그제서야 큐티는 큐티로서 의미있는 것이 아니라 

변화된 나의 존재로서만 그분께 영원히 기념될 그 무엇이 된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 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신 8:2-3).  

 

-안환균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