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

 


 아버지의 기도

이런저런 책을 읽더라도 대부분 책들은 잊혀지고 만다. 그런데 이따금 기억 속에 굳건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필요할 때마다 등장하는 책이 있다. 오늘은 이런 책과 관련된 추억을 소개하고 싶다.

언젠가 한 문인이 ‘부산의 다섯 가지 특징’이란 제목의 짧은 칼럼을 기고한 것을 읽었다. 이 가운데 유독 두 가지가 눈길을 끌었는데 하나는 부산이 ‘불교의 메카’로서 어느 도시보다 불교신도가 많은 점이다. 다른 하나는 ‘역술계의 메카’로서 역술업계의 고수들이 포진하고 있는 곳이라 한다.

글을 읽으면서 내가 나서 자란 경남 통영(統營)이란 곳을 머리에 떠올렸다. 지금은 관광으로 사는 사람들이 늘어났지만 예전에는 대다수가 바다를 상대로 생계를 해결했다. 바다라는 곳이 본래 길흉화복의 변천이란 점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곳이 아닌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무속이나 불교에 기대는 성향이 강하였다. 아마도 통영은 부산 못지않게 무속과 불교의 영향력이 강한 곳이라 불러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경남 통영이 낳은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김용식(金溶植) 전 외무부 장관이다. 훤칠한 키에 잘생긴 외모는 누가 보더라도 영국 신사를 연상시키는 분인데 이분은 한국의 초창기 외교사에서 지울 수 없는 분이다. 중앙고보와 일본 주오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고문사법과에 합격, 활동하다 1948년 법정에 서게 된 김구 선생을 변호함과 아울러 외교계에 투신한 인물이다. ‘한국 외교관의 무덤’이라 불리는 주일 수석공사를 50년대에 6년간 재임하면서 초기 한·일 외교의 자주적 기틀을 세웠으며 외무부 장관과 통일원 장관을 역임한 분이다.

내가 그분 소개를 장황하게 풀어놓는 이유는 그동안 읽었던 책 가운데 이따금 떠오르는 내용 때문이다. 이분은 ‘김용식 외교 33년’이란 부제가 붙은 ‘새벽의 약속’(김영사)이라는 책을 1993년에 펴낸 적이 있다. 자서전과 회고록 성격의 책이기 때문에 한국 외교가 초창기에 어떻게 자리를 잡아가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을 펼치면 무척 인상적인 대목이 등장한다. 무속의 영향이 강했던 통영에서 일찍부터 기독교를 받아들였던 김용식 전 장관의 부친이 등장한다. 그는 장남인 어린 자식을 통영에서 해가 가장 일찍 떠오르는 여황산(艅鳳山) 산정에 데리고 올라가 매일 아침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김용식씨가 1913년생이니까 아마도 그때가 1920, 30년대로 추정된다. 그는 이렇게 회고한다.

“산정에 올라가면 옛날 봉화 초소의 바윗돌이 있다. 선친은 그곳에 나를 앉게 하시고, 머리를 숙이게 한 후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가 자라나서 장래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아침기도를 하셨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뜨게 되면 김용식씨의 눈앞에는 동편의 매일봉에서 힘차게 붉은 해가 떠올랐다고 한다. 서문에서 아버지의 기도와 관련된 이야기는 이렇게 계속된다.

“선친과 나는 아침의 산길을 따라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이것이 나의 유년시절 일과 중 하나였고, 간절히 기도하는 선친의 모습이 그 후 나의 생애에 때로는 등불이 되었다. 긴 생애에 나는 선친이 바라셨듯 우리 사회에 별다른 공헌을 못하였으나, 나의 삶의 길목에서 때로는 여황산 정상에서 부자가 머리 숙이고 마음속 깊이 새긴 ‘새벽의 약속’을 회상하게 된다.”

이 책을 읽을 무렵 필자의 나이는 30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당시에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지만 붉은 형광펜으로 뚜렷하게 표시를 해 두었다. 아마도 통영 바다의 아름다운 광경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아버지가 되어 어린 아이를 키우는 입장에서 감동을 받았을 수도 있다. 세월이 흘러 이제 50대가 되어서 이 장면을 이따금 떠올리게 되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했기 때문일 것이며, 장성해서 저마다의 길을 찾아가는 아이들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우리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살아가건 모든 부모의 소망은 비슷할 것이다. 그것은 자식들이 잘 자라서 자신과 가족과 사회에 큰 기여를 할 수 있는 그런 인물로 성장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세상사에는 우여곡절이 많을 수밖에 없고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통제할 수 없는 거대한 영역이 존재함을 우리는 잘 알게 된다. 때문에 부모가 되면 자식을 위해 무엇을 해 줄 수 있겠는가. 노년에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던 아버지를 회상하는 김용식씨의 글에서 나는 아버지의 기도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확인하게 된다. 김용식씨의 회고담에서 나는 그의 인생을 지탱했던 두 가지 축을 떠올리게 된다. 하나는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라”(시 119:105)는 성경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아버지가 평생 자신을 위해 행하였던 새벽기도다. 아버지의 새벽기도가 그로 하여금 평생 반듯하게 자신의 길을 걸을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었을 것이다.

공병호(공병호경영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