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승과 회귀의 선순환


 





상승과 회귀의 선순환

                                                                   김기석 목사(청파교회)

 


조 계종 불교사회연구소가 지난 8월 16세 이상의 국민 1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2014년 한국의 사회·정치 및 종교에 관한 대국민 여론조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종교에 대한 신뢰도를 묻는 질문에 응답자들은 천주교 불교 개신교 원불교 이슬람 순으로 꼽았다. 비교적 소수 종교인 원불교와 이슬람을 제외하면 개신교는 우리 사회에서 불신의 아이콘이 된 셈이다. 이슬람을 신뢰한다는 응답도 적지 않게 나온 것을 보면 우리 사회의 종교 지형도가 변화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영향력을 묻는 질문에 대해서는 천주교 개신교 불교 원불교 이슬람 순으로 응답했다. 사회 발전에 기여한 종교를 묻는 질문에는 가장 많은 이들이 “없다”고 대답했다. 종교 전반에 대한 부정적 평가가 늘어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문제는 종교 간 갈등 원인을 제공하는 종교를 묻는 질문에 무려 59.2%의 응답자가 개신교를 꼽았다는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개신교회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이 더 이상 호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일전의 어떤 통계에서는 ‘개신교’ 하면 연상되는 단어를 묻는 질문에 ‘배타성’, ‘헌금 강요’, ‘독선’, ‘세습’이라고 답한 이들이 많았다. 거기에 이제는 성추행이라는 단어까지 추가될 형편이다. 개신교회가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세상이 변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많은 이들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말하듯 언론이 개신교회에 대해 유난히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런 문제가 전혀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진단은 문제의 뿌리는 살피지 않고 곁가지만 흔드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문제의 본질은 우리가 하나님을 제대로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던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실상은 돈과 목회 방법론과 리더십 이론을 믿었던 것은 아닌가?

크로아티아 출신의 미국 신학자인 미로슬라브 볼프는 <광장에 선 기독교>에서 기독교가 원래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는 것을 일러 ‘기능장애’라고 말한다. 그는 기독교는 ‘상승’과 ‘회귀’의 선순환 속에 있을 때 건강하다. 상승이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내면화하는 과정이라면, 회귀는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세상에 나아가 메시지를 전하고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과정일 것이다.

상승이라는 측면이 기능장애를 일으키면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첫째는 신앙의 기능 축소이다. 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척하면서 실은 신앙과 관계없는 목적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확장의 욕망과 관련된 것이다. 둘째는 우상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성서가 증언하고 있는 하나님을 가리고 자기들이 만들어낸 이미지를 사람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밀로슬라브 볼프는 그 예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는 말씀을 “내가 너를 승리하게 하리라”는 말로 대치하는 것과, 십자가가 적대감을 극복하는 창조적인 사랑이 아니라 파괴와 폭력의 상징이 되어 버리는 현실을 지적한다.

회귀라는 측면이 기능장애를 일으킬 때도 역시 두 가지 문제가 일어난다. 첫째는 신앙의 나태함이다. 이것은 적당히 체제에 길들여지는 것이다. 이때 종교는 ‘진정제’와 ‘신경안정제’ 혹은 ‘환각제’와 ‘흥분제’로 기능한다. 이 경우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의 일부가 되기보다는 자기 이야기 속에 하나님을 끌어들이려 한다. 둘째는 신앙의 강요이다.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들을 강제함으로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갖도록 만드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어느 선교 신학자는 선교란 ‘매력의 감염’이라 했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의 삶이 매력적이면 선교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가을이 되면 개신교의 각 교파의 총회가 열린다. 총회가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고 수렴하는 다중 지성의 정원이 되면 좋겠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다. 연회 감독을 선출하는 선거가 예정되어 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마다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되뇐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1:10). 말(末)을 취함으로 본(本)을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본을 취함으로 말까지 얻는 길을 모색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