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쉼과 여가

목회자의 쉼과 여가

이런 우화가 있다. 천국에서 작은 소동이 있었는데, 예수님이 하늘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천국에 들어온 한국인 목사님을 맨발로 달려가 포옹하고 기뻐했다. 천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평신도가 이 모습을 보고 퉁명스런 목소리로 천사에게 묻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문을 지나 내게로 오는 대형교회 목사가 얼마만인지 모른다. 요즘 성직자는 천국에 오기에는 너무 바쁜 것 같아. 천국티켓은 그저 주는데 뭣 때문에 그리 분주한지?” 방송을 통해 널리 알려진 목사님을 몇 년 전에 인터뷰한 일이 있었다. 대형교회 목회를 하다 보니 자의반 타의반으로 쉴 틈이 없다. 좋은 방법이 있으면 하나 소개해 달라고 하여, 개혁주의 영성신학자인 마르바 던 교수가 ‘안식’에서 제안한 4가지 ‘그침, 쉼, 받아들임, 누림’ 중에서 먼저 앞의 두 가지를 실천해 보라고 말씀드렸다. 그냥 일주일에 한나절을 정기적으로 정해놓고 아무 계획도 잡지 말고 골목산책, 커피와 책읽기, 근교 드라이브 등 하고 싶은 일을 해보시라고 권했다. 하지만 그 목사님은 “그게 어디 내 맘대로 할 수 있는가?” 라고 하면서 화제를 돌렸다. 

수개월 동안 여러 차례 약속을 조정한 후에 모 교회 원로목사님을 만난 적이 있다. 평소 은퇴 후에는 평온한 생활을 하겠다고 종 종 말씀하시던 목사님께서 미안한 맘으로 하시는 말씀이 “백수가 과로사 한다는 말이 농담인줄 알았는데, 늙은이 한테 왜 일이 찾아서 오는지?” 잠시지만 두 가지 느낌이 들었다. 한 가지는 은퇴 후에도 찾는 곳이 많으니 감사한 인생이다. 다른 한 가지는 평소에 일만하다보니 은퇴 후에도 일에서만 목회자의 정체성을 찾을 수밖에 없구나.  


기본적으로 삶이란 일과 쉼과 여가의 균형과 리듬으로 이루어진다. 창조의 섭리에서 삶의 3요소는 상호보완적이지 양자택일의 대립적 위치에 있지 않았다. 창세기 1장의 청지기 소명에서도 일과 쉼과 여가로 이루어진 풍성한 삶을 먼저 명령하신다. 일이 건강하면 쉼과 여가도 건강 할 수 있고, 쉼과 여가가 균형을 잃으면 일 역시 왜곡 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흔히 쉼과 여가를, 일을 더 잘하기 위한 부차적 가치로 인식하는데 이것은 착각일 뿐이다. 하나님은 천지창조 7일째 일을 그치고 쉬면서 그날을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셨다. 안식일에 창조물과 함께 창조의 아름다움을 기쁨으로 음미하셨다. 이것이 창조의 완성이요 목적으로서의 안식일이지, 안식일은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수단이 결코 아니다. 일(사역) 중심적 신앙생활에서 크리스천의 쉼과 안식은 언제나 유보되고 부차적이며 부정적 가치로 그려지고 죄악시된다. 삶의 균형과 리듬을 잃어버린 피로생활이 과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일까? 누구든지 시간, 돈, 건강, 사역, 갈등 중 어느 하나 걸림 없이 자유로운 삶은 없다. 이것은 쉼과 여가의 필요조건이 될 수는 있지만 전제조건은 아니다. 우리가 일해야 하는 이유는 말할 필요도 없이 너무도 많다. 동시에 한국교회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쉼과 여가를 누리는 데는 무지하고 인색하지 않은지?
[옥성삼의 일과 안식] 목회자의 쉼과 여가 기사의 사진

옥성삼 

약력=△연세대 신학과 △명지대 여가학 석사 △서울과학종합대학원(aSSIST) 경영학 박사  △생활여가연구소 소장 △한국교회언론연구소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