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은 달라도 성령님은 함께 하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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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달라도 성령님은 함께 하실 수 있다.

예수님을 제외하고, 둘 중의 하나만 ‘진리의 길, 옳은 길,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선입관일 수 있습니다.

일례로, 바울과 바나바는 2차 전도 여행 직전에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2차 전도 여행에 데려가자고 했고, 바울은 1차 전도 여행에서 성실하지 못했던 마가 요한은 자격 미달이라고 했습니다. 이 일을 두고 둘의 견해차는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고,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갈라서게 됩니다. 둘 모두가 미성숙해서 합의를 보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각자의 부르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구브로로 가고, 바울은 실라와 함께 행로를 달리했습니다. 물론, 바나바와 바울 모두 나름대로 물러설 수 없는 원칙과 이유가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런데 디모데후서 4장을 보면, 감옥에 갇힌 바울이 그 마가 요한을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두 선교팀의 여정 가운데 성령께서 강하게 역사하시고, 모두가 아름답게 쓰임 받았다는 것을 바울도 깨닫게 된 것입니다.

모두에게 그 여정에서 성령께서는 강하게 역사하셨고, 모두가 그렇게 아름답게 쓰임 받았다는 것을 바울도 나중에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늘의 우리 한인 공동체 안에도 간단한 설명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들이 얽혀 있습니다. 여기에는 동성애 이슈만이 아니라, 연회와의 신뢰 관계를 비롯해 연회 리더쉽과의 부정적, 긍정적 경험들과 서로의 생각을 존중하고 인정해 주는 범위를 넘겨버렸다고 느끼는 상황들도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연회마다 교회마다 목회자마다 판단하는 정황이 다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우리 연회는 안 그런데 왜 저들은 우리처럼 느끼지 않는 거지?” 하는 생각은 성급한 일반화일 수 있습니다.

그 성령 충만한 바울과 바나바도 합의하지 못했던 일을 기억하며, 부득이 길이 나뉘는 결정을 하게 되더라도 얼마든지 그 안에서 서로 축복하며, 함께 귀한 동역자로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에 덧붙여 저는 이런 생각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신앙 양심으로, 동성애 결혼 주례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고 있지만, 주님께서는 구원하길 원하시는 사람을 위해, 동성애자냐 아니냐의 이슈를 뛰어넘어 얼마든지 선교적 동역자로 그들을 부르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말입니다.

성경에도 그런 예가 있습니다.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성령께서는 빌립이 에티오피아 여왕의 국고를 맡은 간다게라는 내시를 만나도록 인도하십니다. 내시는 당시 율법적으로 부정하고 결함이 있는 존재로 여겼기 때문에, 성전에 들어올 수도 없는 처지였는데, 성령님이 빌립을 보내, 고국으로 돌아가는 간다게 내시를 만나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세례도 주게 하신 것입니다. 이후 그 내시는 고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고, 에티오피아는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한 이후 불과 20년 만에 기독교를 국교로 공인하는 나라가 됩니다. 이를 통해 보건대, 적어도 성령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데 있어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 교단의 동성애 목회자 안수 이슈와 관련해, 얼마만큼, 어떻게 적용되는 것이 적절할까 하는 것은 더 많은 부분을 고려하고 고민해야 하겠지만, 주님께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리를 사용하시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것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부분이라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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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사는 한인목회강화협의회가 2022년 6월 27-28일 이틀간 줌으로 주최한 <미래를 향한 거룩한 대화(Holy Conferencing on What’s Next?)>에서 조선형 목사가 발표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