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에 기억해야할 믿음의 선진- 주기철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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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월에 기억해야할 믿음의 선진- 주기철 목사

 "1944년 4월 21일 밤 9시 경,  서서히 몸을 일으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고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쳣다"

 

일사각오(一死覺悟)! (죽음을 각오하고 나서라!)

  주기철 목사님이 모교인 평양 장로회신학교의 사경회 강사로 가서 전한 설교 제목입니다. 그리고, 목사님은 그 설교대로 죽음을 각오하고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하시다가 결국 감옥에서 순교하셨지요. 설교와 삶이 일치했던 진정한 설교자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신앙 선배님들 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을 들라면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주기철 목사님과 손양원 목사님을 꼽을 것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은 달랐지만,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한결같이 충성했다는 면에서는 두 분이 똑같았지요. 이 '허다한 증인들' 시리즈 시작을 손양원 목사님으로 했는데 주기철 목사님은 너무 늦게 소개하는 감이 있네요. 어쩌면, 그분의 삶을 나누기에는 제 모습이 너무 부끄러워서 그랬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다른 분들도 모두 마찬가지이긴 합니다만…ㅜㅜ)

 

   목사님은 1897년 생입니다. 16세였던 1913년에 남강 이승훈이 설립한 오산학교에서 1915년에 세례를 받고 공개적으로 신앙을 고백하게 되지요. (믿음을 가진 것은 1910년쯤이라고 합니다) 세례를 받으면서 이름을 기복(基福)에서 기철(基徹)로 바꿨다고 하더군요. '기독교를 철저히 믿는다'라는 의미라고 합니다.

 

   오산학교에서 그의 신앙과 민족 의식 모두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당시 일제 치하에 있던 우리나라에서 기독교는 민족의식과 떨어질 수 없었거든요. 남강 이승훈 선생이 교장인데다가 물산장려운동을 전개했던 고당 조만식 선생까지 교사로 계셨다고 하니 정말 신앙과 민족의식의 전당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지요?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민족계몽운동을 하던 주기철 목사님은 당시 최고의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의 집회에서 큰 은혜를 경험하고 목회자로의 부르심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26년에 부산 초량교회, 1931년 마산 문창교회를 거쳐 1936년 드디어 평양 산정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지요. (당시 산정현교회의 장로로 있던 스승 조만식 선생님이 마산까지 내려와서 간곡히 부탁했다고 하네요) 이제 주 목사님의 남은 생은 이곳에 바쳐질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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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목사님이 그토록 반대한 신사참배에 대해 잠깐 알아볼까요? 신사(神社)란 일본의 고유종교인 신도(神道)의 신을 제사드리는 사당입니다. 사실 종교라기 보다는 일왕이나 조상을 모시는 국민 신앙의 성격을 가지고 있지요. 당시에는 아예 국가에서 신사를 관리하면서 신사참배를 통해서 전국민의 일치성을 강조하고 국가와 일왕에게 충성을 다짐하게 했습니다. 원래 조선에서는 일본인들만 참배하게 했었지만, 슬슬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라는 미명 아래 신사참배를 유도하다가, 1925년에는 남산에 조선신궁을 지어서 본격적으로 신사참배를 강요하지요. 조선의 정신을 말살하려는 의도였습니다.

 (아래의 사진은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일본의 야스쿠니 신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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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든 조선인이 신사참배에 반대했지만, 교회는 더더욱 반대했습니다. 신사참배는 교회가 가장 싫어하는 우상숭배에 해당하는 행위였거든요. 일본은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라 국가 의식이다'는 논리를 내세웠지만 교회는 그런 궤변에 넘어가지 않았지요. 조선에 들어와 있던 대부분의 선교사들도 이 문제를 우상과의 전쟁으로 보고 절대불가라는 방침을 세웠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많은 선교사들이 추방되고 그들이 운영하던 기독교 학교들도 문을 닫게 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심해지는 일본의 탄압에 결국 기독교계도 하나씩 무릎을 꿇게 됩니다. 1936년에 카톨릭이 제일 먼저 신사참배를 받아들입니다. 아예 교황이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고 허용한다는 교시를 발표했지요. (흠.. 혹시 그 직전에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3국 동맹을 맺었던 것과 무슨 관계가 없는지 모르겠네요.. 음모론이지요^^;)   

   그 뒤를 이어 안식교, 성결교, 구세군, 성공회, 감리교가 차례로 굴복했습니다. 그리고 1938년 9월 10일에 열린 장로교 총회에서 이미 일본의 회유에 굴복했던 목사들은 '신사참배를 솔선해서 이행하겠다.'는 결의안을 발표합니다. 강대상 앞에는 경찰 간부들 수십 명이 긴 칼을 차고 앉아 있고, 양편 좌우에는 무장 경찰들이 둘러싸고 있던 상황이었지요. 반대하는 사람은 경찰에 의해 바로 끌려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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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기서 잠깐, 침례교회는 신사참배에 대해서 교단차원에서 유일하게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단입니다. 1935년에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선포하고 반대운동을 전개하다가 결국 1944년 5월 10일에 교단이 강제 해체되었지요. 그래서 침례교에서는 매년 5월 10일을 신사참배거부 기념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오~ 멋진데요!)

 

   장로교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안이 통과되던 날, 주기철 목사님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미 감옥에 들어가 있던 상태였습니다. 일본이 아예 총회에 가지 못하게 하려고 8월말에 미리 손을 썼던 것이지요.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 후에야 석방된 주기철 목사님은 여전히 설교때마다 신사참배를 우상숭배라며 강력히 규탄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그런 뜨거운 설교와 믿음으로 인해 산정현교회는 나날이 부흥하게 되었지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주 목사님의 열정적인 설교는 사람들의 양심을 찌르고 회개하게 했으며 결단하게 했습니다. "우상 숭배자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떠나가라!"며 호통을 치기도 했다고 하는군요. 화끈하지요? 결국 일제는 주 목사님을 다시 구속합니다.

 

   끝까지 목사님과 산정현 교회를 굴복시킬 수 없었던 일제는 최후의 카드를 들고 나옵니다. 바로 '목사직 파면'이었지요. 그런데 장로교에서 목사직 파면은 교회의 상위 기관인 노회(총회보다 한 단계 아래라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산정현 교회는 평양노회 소속이었지요)에서 결정해야 합니다. 그들이 어떻게 했겠습니까? 1939년 12월 19일 일제는 또다시 친일 목사들을 앞세워 임시 노회를 연 뒤, 주기철 목사직 파면건을 심의에 올립니다. 단 1명이 반대하고 (역시 바로 경찰에게 끌려나갔지요) 3-4명이 찬성하고 (친일 목사들이겠지요?) 50여명은 침묵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노회장은 주기철 목사님의 파면을 선고합니다. 이 일이 꽤 유명한 사건이어서 일반 신문에까지 실릴 정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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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임목사가 파면되면 노회에서 교회에 임시 목사를 보내게 됩니다. 그런데 그 강직한 산정현교회 사람들이 임시로 온 목사를 인정했겠습니까? 신사참배를 하는 목사를요? 그럴리가 없지요. 그들은 따로 모여서 찬양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을 굴복시킬 수 없었던 노회는 또다시 경찰의 도움을 받아 교인들을 강제로 끌어내고 교회를 폐쇄했지요. 그리고 사택에 살던 주기철 목사님의 가족을 내쫓았습니다. "이 사택은 하나님이 주 목사에게 주신 곳이니 주 목사가 와서 같이 나가자고 하기 전에는 절대 나갈 수 없다"고 저항하던 주 목사님의 어머니는 경찰에게 들려 대문 밖에 내팽개쳐졌고, 오정모 사모님도 유치장에 갇혔습니다. 아.. 가족들까지 고난을 겪습니다.ㅜㅜ

 

   일제는 감옥에서 주기철 목사님의 신앙과 절개를 꺾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매질을 했습니다. 가장 잔인했던 것은 가족을 불러다놓고 그 앞에서 공중에 매달아 놓고 매를 쳐서 그네처럼 왔다갔다하게 만든 것이었습니다. (아.. 너무 잔인한 짓 아닙니까..) 그 자리에 있었던 아드님의 증언에 따르면 주 목사님은 20회가 되기 전에 기절했고, 주 목사님의 모친은 그 전에 기절했으며, 사모님은 고문이 시작되자마자 '오, 주님'하면서 기도만 하셨다고 합니다.ㅜㅜ

 

   전기문에 모진 고문과 옥중 생활로 인해 몹시 쇠약해진 주기철 목사님이 간수의 등에 업혀서 면회실로 와 마지막으로 사모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더군요. 사모님께서 먼저 입을 열었지요.

   "당신은 꼭 승리하셔야 합니다. 절대 살아서는 이 문 밖을 나올 수 없습니다."

   "그렇소. 내 오래지 않아 주님 나라에 갈거요. 거기서 교회와 조선을 위해 기도하겠소. 내 이 죽음이 한 알의 썩은 밀알이 되어 조선 교회를 구해주기 바랄 뿐이요…"

   그리고 다시 간수 등에 업혀서 면회실에서 나갈 때,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 될것을 예견한 사모님께서 울먹이며 "마지막으로 부탁할 말씀이 없느냐"라고 했더니 "여보, 나 따뜻한 숭늉 한 그릇 마시고 싶은데…" 하시더랍니다. 아.. 이 장면에서 그만 눈물이 펑펑 쏟아지고 말았습니다ㅜㅜ  

 

   그리고 1944년 4월 21일 밤 9시 경, 목사님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들고 "내 영혼의 하나님이여, 나를 붙드시옵소서!"라고 외치고는 이 땅에서의 생을 마치고 신사참배의 강요도 없고 친일하는 무리들도 없는 하나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그의 나이 47세였지요. 어쩌면 모교에서 일사각오라는 제목으로 설교했을 때 이미 이런 최후를 예감하셨던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뒷 이야기가 더 있어요.

   1939년에 평양노회에서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했다고 했지요? 뭐, 그거야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일 테니 해방이 되면 바로 복직시켰을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잘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무래도 신사참배를 한 목사들이 계속 주도권을 잡고 있어서 그런게 아닐까요? 음모론입니다^^;;) 

   그러다가 평양노회는 2006년에 와서야 67년 만에 정기노회를 열어 '참회 고백서'를 발표하고 신사참배를 결의했던 것, 주기철 목사님을 파면한 것, 산정현 교회를 폐쇄한 것, 가족들을 사택에서 쫓아낸 것을 공개 회개했습니다. 늦어도 너무 늦었지요. 솔직히 이제 와서 뭘… 이라는 생각까지 들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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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시대에 비하면 지금 우리는 너무나도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감사하기보다는 불평하며,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면서 타협하며 살고 있지요. 죽음을 각오하기는 커녕 나와 내 가족의 안위만을 생각하며 약간의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도 어려워합니다.

   아, 다시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습니다. 사실 너무나 높고 거대해서 감히 따라갈 엄두도 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만,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믿음을 지킨 선배들의 삶을 만분의 일이라도 본받아야겠습니다. 아닌 것에 대해 과감하게 아니라고 말하는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은 죽는 길이지만, 그것이 바로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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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영기 목사 (한국의 함께걷는 교회를 담임하는 침례교 목사)